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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같은 날씨는 별로 알고 싶지 않은 우중충함의 정수를 가감없이 보여준다. 오전부터 부슬부슬 비가 내리고 딱히 기온이 내려 간 것도 아닌데 어깨는 웅크려지고 어쩐지 몸이 으스스 떨린다. 엄마는 이런 날을 두고 '먹을 거 두고 저만 안 줘서 토라진 것처럼 꿍한 날씨'라고 부른다. 생활인의 번뜩이는 표현력에 박수를 보낸다.
가을다운 날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지금은 가을의 끝물이다. 일주일치 장을 보며 포도를 싸게 팔길래 사들고 왔는데 포도에서도 완연한 끝물의 맛이 났다. 더불어 2009년도 끝물, 나의 청춘도 끝물이다. 어제는 오래된 친구들과 약속이 있었다. 만으로 스물도 안 되던 시절에 만났던 친구들이니까 그 때는 말 그대로 홍안이었는데 그들은 이제 곧 서른, 나는 그들보다 한 해 뒤쳐져서 꾸준히 나이를 먹고 있다. 그 중 나와 가장 절친한 친구는 비만 때문에 건강이 악화되었고 여섯 시 이후에는 절대로, 아무것도 먹지 않는다고 사전에 통보했다. 그러자 다른 친구가 다같이 양꼬치와 칭타오를 먹으려고 했다며 아쉬워했다. 다이어트 중인 그 친구는 내가 아는 모든 사람 중에서 맥주를 제일 맛있게 마시는 사람이었다. 맥주가 마시고 싶으면 자연히 그 친구가 생각나곤 했는데 말이다. 할 수 없이 칼로리 없는 아메리카노와 허브차나 홀짝였다. 또 다른 친구는 나에게 왜 이번에는 생일 파티를 하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내 생일에는 언제나 재미있는 일이 있었던 거 같은데 올해는 왜 조용히 보냈는지 궁금해 했다. 내가 무슨 패리스 힐튼도 아니고 내 생일에 딱히 재미있을 게 무엇이겠느냐만 돌아보면 조용히 보낸 적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그래봤자 아침이면 마스카라가 단단하게 굳어 눈이 떠지지 않고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 출처가 알 수 없는 멍자국 두어 개와 머리카락에는 지하실 냄새, 숙취와 갈증만이 남았다고 하면 충분히 짐작 가능한 밤이다. 주변이 온통 시끄럽고 지저분하고 무질서했다. 그러나 올해는 그런 부류의 재미를 쫓고 싶지 않았다. 대신에 애인이 사온 케익 위에 초를 잔뜩 올리고 불을 껐다. 나는 이제 재미를 원하지 않는다. 재미로 전화를 걸어 아무나 불러 내고 재미로 누군가에게 말을 걸고 재미로 엉뚱한 짓을 하던 시절을 모두 지났다. 체면이나 피로감 따위를 말하고 싶은 게 아니다. 이런 기분을 알아버린 이상, 무엇을 해도 이전과 같은 재미를 느낄 수 없다는 게 확실하기 때문이다. 청춘이 짧다는 것을 비극이라 하기 민망하다면 인간에게 내려지는 형벌 중 하나라 불릴 자격은 충분할 것이다. 나에게도 작은 재미로. 크게 위로 받던 시절은 이렇게 덧없이 가버렸다. 이제 더는 '젊지조차 않은' 어떤 시간만이 나를 기다린다. 그 시간이 닥치면 어떻게든 합리화를 하며 살아갈 테지만 그 합리화의 근거들이 상실감까지 메꾸어 주지는 못한다. 굳이 겪어보지 않아도 충분히 알 만하다. 다만 나는 청춘이 완전히 끝나버린 사람들이 무엇에 매달려 살아가는지 궁금하다. 나이 든 사람들은 모두 행복을 가장하기에 바쁘지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 그들은 애초에 진실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듯이 군다. # by bircktop | 2009/11/29 00:28 | 트랙백
![]() 내가 이 관계에 주목하는 또 다른 이유는 섹스를 배제하고도 남자를 들뜨게 할 수 있는 세경의 저력이 부럽기 때문이다. 물론 세경은 가슴도 크고 얼굴도 예쁘지만 세경에겐 그게 전부가 아니다. 남자들이, 특히 준혁 또래의 남자들이 순정의 대상으로 삼고픈 여자가 따로 정해져 있다면 바로 저런 여자가 아닐까. 하지만 이게 꼭 환영할 만한 일이 아닌 게 남자의 순정 따위는 얼마 못 가서 말끔한 백지를 내가 제일 먼저 더럽히며 희열을 느끼는, 저급한 정복욕으로 변질되기 때문이다. 그런데다 세경은 정복욕의 표적이 되기에도 더 없이 좋은 위치에 있다. 우선 그녀는 아직 나이도 어린데 오 갈 데가 없어 어린 여동생을 혹처럼 달고 허구헌날 집구석에 처박혀 식모살이나 해야 한다.'우리 집 식모 여자애는 산에서 살다와서 세상 물정을 잘 모른다, 게다가 예쁘고 가슴이 큰 데다 말도 잘 듣는다.' 이런 설정은 세상 모든 남자들의 로망이다. 아니, 이게 아무리 픽션이라지만 너무 하지 않나. 물론 밝고 긍정적인 이 드라마의 성격상 세경이 임신을 하고 현경에게 내쳐지거나 하는 이런 쌍팔년도 스토리로 흘러가지는 않을 것이다. 준혁이든, 그의 삼촌이든 세경의 처지와 가난마저 떠안는 것으로 아름답게 마무리 되겠지.
마음 먹고 쇼핑할 생각인데 마땅한 아이템이 없을 때 나는 당최 되는 일이 없는 것 같아 절망한다. 그러나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괜찮은 물건을 발견하면 고작 돈을 주고 물건을 사왔을뿐인데 뭔가 대단한 일을 해낸듯한 착각에 빠진다. 여전히 돈은 없으나 갈수록 눈만 높아져 요즘은 물건 사는 게 보통 일이 아니다. 최근에는 정말 다시 그 과정을 반복하라고 하면 죽어도 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명동을 이 잡듯이 돌아다녔다. 밤에 자려고 누우면 하루 종일 봤던 물건들의 잔상이 시야에 남아서 둥둥 떠다니질 않나. 이제 이런 과격한 쇼핑은 자제해겠다. 제 아무리 생일 시즌이 돌아오더라도 말이다. 아무튼 지난하고도 험난한 부츠 원정은 실패에 실패를 거듭하다가 어제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발이 들어가는 부분과 종아리 둘레가 모두 잘 맞아야 한다는 부츠의 까다로운 성격상, 직접 가죽의 재질을 확인하고 신어보기까지 해야해서 부츠 원정은 정말 힘들었다. 하지만 어제부로 모두 끝났다. 이제 구두는 가까운 삼청동에서 구입하면 되다는 사실과 역시 쇼핑에서의 성공은 발품팔이에 비례한다는 진리를 거듭 확인하면서 말이다.
삼청동은 지금도 수제화 가게들이 꽤 많이 모여있는데 골목마다 새로 생기는 가게 또한 많다. 수제화 업계에서 잔뼈가 굵은 분들이 이 동네에 샵을 내며 수제화의 자웅을 겨루어 보자, 이런 분위기랄까. 의외로 4,50 대 아저씨들이 샵 주인인 경우가 많다. 어느 가게에도 수제화를 27년간 만들었다는 아저씨가 주인이셨는데 가죽의 재질이나 가격이 그만하면 괜찮았지만 금방 담배를 피웠는지 담배 냄새와 입냄새를 풀풀 풍기면서 "아가씨, 이걸로 해. 딱 보니까 이걸로 한 치수 크게 신어주면 간지 좀 나겠어 흐흐"라고 말하는 대목에서 비위가 상했다. 부츠 디자인도 어딘가 모르게 부족해서 그 길로 그냥 뛰쳐 나와버렸다. 그리고 거의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졌을 때 어느 지하 구두가게로 들어갔는데 그곳 역시 터무니 없는 구두 가격을 자랑하길래 낙심하려는 순간 직원은 40% 할인을 제안했다. 내심 기뻐하며 부츠 속으로 발을 집어 넣었는데 뭔가 대단히 잘 맞는다! 아니 이렇게 잘 맞을 수가, 스키니를 입고도 약간의 여유가 남는 부츠를 원했는데 이건 종아리 둘레와 신발 부분이 모두 완벽하게 맞았다. 나는 거울로 핏을 한번 확인하고는 무조건 반사 동작으로 지갑을 꺼냈다. 색상이 브라운뿐이라 일주일을 기다려야 하지만 괜찮아 ㅠ.ㅠ너로 인해 부츠 원정이 막을 내렸으니까. 그리고 이 키 크고 젊은 남자가 나에게 펌프스도 구경해 보라며 충동질을 시작했다. 나는 쇼핑을 하거나 미용과 관련된 서비스를 받으면 굉장히 경직되고 심하게 말이 없어져 '제발 날 건들지 말아줘, 권하지도 말고 강요하지도 마. 내 볼일만 보고 사라질게 부탁이야.'딱 이런 자세가 되고 마는데 남자와 여자 구두를 화제로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니 나의 절친한 친구 J.새도 생각나고 갑자기 여기서 조금만 더 놀고싶어졌다. 게다가 그 가게는 지하인데다 인적도 드물고 손님도 없어 거의 내 세상이나 다름 없었다. 그래서 굽이 송치로 둘러 싸인 힐과 색색의 공단, 뱀피로 만들어진 예쁘고 정신 나간 디자인의 펌프스들을 죄다 꺼내고 신기 시작했다. 직원은 나에게 앞으로도 구두를 사거든 둥근 코 보다 앞 코가 오똑한 신발, 그리고 굽이 가늘게 떨어지는 힐을 신으라고 충고했다. 아니 내가 둥근 코에 리본 달리고 굽높이 어정쩡한 구두를 저주하는 걸 어찌알고. 직원은 내가 하는 양을 아무런 재제 없이 지켜보더니 갑자기 나에게 제일 앞줄에 서있는 에나멜 펌프스를 신어보라고 했다. 그 때까지만 해도 별 생각없이 발을 집어넣는데 역시 놀랍게 잘 맞는다. 정작 본적이 없어 내용은 모르지만 제목이 '구두가 발에 맞는다면'인 영화처럼. 이게 다 그 고단수 직원의 꼬드김이라는 것을 알지만 어쩔 수 없었다. 진이나 스커트 지금은 갖고 있지 않지만 앞으로 생길지도 모르는 다소 고리타분한 정장 차림에도 어울릴 검은색 애나멜 펌프스인데다 굽이 9센티인데도 착화감도 최적인데 이걸 어떻게 사지 않겠어. 다행히 샘플로 제작된 구두라 다른 펌프스의 절반도 안되는 가격에 샀다. 그리고 직원에 말에 의하면 이 구두는 제작하지 않기로 결정됐기 때문에 세상에 단 한컬레뿐이다. ![]() ![]() 그는 나를 바로 옆에 위치한 카페에 데려가더니 커피를 한 잔을 사주었고 나는 그에게 거금을 바치고 헤어졌다. 그리고 몇 푼 안 되는 거스름돈과 카드 전표, 펌프스를 덜렁 들고 집으로 왔다. 주인공인 부츠 사진은 다음 주에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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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아님은 14일이 생일이죠..by bircktop at 11/21 맞아요. 보통 너무 무관.. by bircktop at 11/21 그 직원이 고단수로군요... by 루아 at 11/20 음...제가 맘속으로 .. by 루아 at 11/20 저는 지금 체호프 단편선.. by 라껠 at 10/18 루아님은 이제 아는(?).. by 브릭톱 at 10/17 결국 이걸 사야 하는 걸.. by 브릭톱 at 10/17 장점을 충분히 울궈서 .. by 루아 at 10/17 으아아아 멋진누님포스... by 루아 at 10/12 카우보이의 동성애가 극.. by 브릭톱 at 10/09 | ||||